색채의 온도

2023. 5. 2. - 5. 15.
KBS제주방송총국 갤러리, 제주


그림의 느낌이 그림의 뜻이다
-김지훈 개인전 추상을 찾아서 겨울에서 봄까지 ‘색채의 온도’에 부쳐


미술평론가 김유정(한국미술평론가협회)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이 “마음으로 그려라”라는 말에는 다분히 추상미술에 대한 단초가 있다. 서양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서양미술의 전통은 “다시 나타내다”라는 의미에서 ‘재현(再現(reproduction)’ 미술의 오랜 역사가 있다. 물론 추상미술이 모더니즘 시대의 산물만은 아니다. 이미 추상적 형상은 자연을 해석하거나 마음의 작용의 결과물인 작품에 내재되 있는 속성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소위 회화에서 구상미술의 등장은 3만 년 전 구석기시대 산물인 쇼베 동굴벽화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고 있고, 이어 신석기시대에는 문자 기호의 상징들이 등장하면서 추상미술의 연원을 더듬을 수가 있다. 사실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은 조형예술에 통합된 하나의 밀착된 속성인 것이다. 허버트 리드의 말대로 “본래 모든 예술은 추상적이며…삶의 리듬을 찾는 불확정의 물질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조형미술에는 동시에 구상적 표현과 추상적 표현의 형상들이 섞여있다. 이는 미술이 근원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그 두 가지 형상을 따로 분리해서 볼 수도 있거나 함께 섞여서 존재한다. 즉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은 추상적인 구조들로 이루어지고, 또 반대로 추상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짜인 사실적인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의 예술의 의미를 봐도 사실(寫實)과 사의(寫意)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사실은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말하고, 그리고 사의는 화가의 심리상태에 따른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사실(寫實)과 사의(寫意)라는 두 가지의 개념도 예술은 마음의 작용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추상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특히 서양에서의 추상미술은 사진의 발명과도 연관이 있다. 르네상스 이후 초상화와 풍경화의 발전과 함께 그것을 복제할 수 있는 사진술의 발명에 따라 사실주의 회화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형적 표현인 표현주의 미술이나 추상미술로 나아가는 계기가 했다. 사실상 사진술에 의한 복제의 증가는 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풍경의 재현적인 묘사로부터 마음의 자유로운 표출로 미술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간 계기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의 역사에서 세잔의 등장은 모더니즘 회화 형식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고했다. 물론 미술에서의 형식의 해체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에서부터 나타나지만, 시대의 변화는 곧 새로운 조형의지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 세잔의 획기적인 윤곽선의 해체와 분해되는 형태의 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했다. 현대미술의 확장을 가져다줌으로써 미술의 경계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청년작가 김지훈의 첫 개인전은 추상미술로 시작된다. 그가 세상을 그는 방식은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추상으로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당장에 소통의 문제가 따르기도 하는 일이다. 사실상 주변에서는 풍경의 아름다움, 인물, 무엇인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물의 배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추상으로 그린다는 것은 대상이 무엇이든 말 그대로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의 말대로 “오직 대상들이 존재할 때만 세계의 확고한 형식이 존재할 수 있다” 

세계는 대상들로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예술가의 형식이 탄생한다. 형식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김지훈은 자연의 수많은 대상들을 추상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데 식물, 꽃, 바람, 돌담 등 마음이 따르는 데로 표현하고 있다. 그 대상들을 묘사하기보다는 즉흥적인 면과 형태들로 이루어져 하나의 생각들이 빚어내는 것이다. 추상적인 표현들은 어떤 형태와 색채로 이루어진 율동이다. 돌담이 넓은 잎사귀처럼 보이기도 하고 꽃이 장식 무늬처럼 보이는가 하면 공간을 갖는 선들은 어떤 식물인지 알 수가 없다. 추상미술이 주는 맛은 관람자가 누리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사실상 추상미술에서는 무엇을 닮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람자 각자가 무엇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의 충실한 의미를 알기 보다는 감각적 느낌을 어떤 식으로 받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구상미술에서는 ‘그림은 하나의 사실’이 되지만 추상미술에서는 ‘그림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가’가 된다. 

김지훈은 공간의 작은 분할을 표현하는 색면추상적인 성격의 작업을 주도했다. 청년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가능성을 선뜻 예견할 수 없지만 대체로 세상이 구상미술이 대세인 상황에서 추상미술로써 “세계를 보는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젊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추상미술은 난해하게 여기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을 딱히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추상미술의 감상적인 본질인 “당신의 느낌대로 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렵다는 표현보다는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즐거운 것이 된다. 

예술은 하나의 큰 즐거움에 틀림이 없다. 보는 사람들이 자기 선호의 색과 발랄한 형태들, 무작위로 전개되는 화면의 배치에서 남모르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추상미술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ego)는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며, 감정 또한 환경의 무게에 따르는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감정은 무의식의 심연을 따라 흐르다가 솟구치기가 일쑤이다. 감정의 기폭(起爆)은 예측불가능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김지훈의 추상미술을 찾는 ‘색채의 온도’ 전은 시간적으로 겨울에서 봄까지의 온도차를 느끼게 한다. 색채의 온도란 형태를 찾아가는 여행에서 느끼는 작가의 감정적인 차이를 말한다. 온도가 주는 물리적인 의미로 보면, 외부적인 계절에서 달라지는 색상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의 변화가 충동적인 열에너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열에너지는 감정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제주의 추상미술의 전통은 매우 짧다. 한국전쟁 이후 추상미술의 시초는 기록상 김택화(1962년), 강태석(1965)이다. 이 두 사람은 한국전쟁 기에 미술 수학을 하고 육지로 가 추상을 공부하여 제주로 귀향했다. 그 후 관점 동인들(1977), 한명섭, 백광익, 고민철 등이 추상화가들이다. 김지훈 또한 이제 새롭게 제주 추상미술의 길 위에 섰다. 

이번 김지훈의 첫 번째 개인전은 화가로서의 갈림길에서 추상미술을 선택한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 그가 제주미술의 새로운 공감의 길을 열어가는 시각에서 보면,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느끼는 감정으로 “설렘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암울함에 붙잡힌 불안감, 복잡하고 다양한 일상”들을 (제주)자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도 예술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살 수 있고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림의 느낌이 그림의 뜻이다.”




in Jeju,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