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Ji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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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o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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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새소리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어릴 적 희귀난치병으로 오래 아파야 했고, 어머니는 마지막 선택으로 아들을 데리고 대체의학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10살짜리 사내는 매일 돌부리를 차며 산에 올랐다. 뒷산을 오르고 와서 아침을 먹는 것이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가기 싫은 길, 벗도 없이 기력 없는 어르신들 틈새에 끼어 걷다가 두어달이 지나니 혼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즈음이었다. 뒷산 너머 깊은 산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는 늘 그곳에서 지저귀고 있었겠으나 아마도 나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저 너머 깊은 산에 있는 새들 소리에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넌 누구냐?” 그러자 내가 서 있는 뒷산의 작은 새들도 말을 걸어왔다.

친구들이 생기자 산을 오르는 것이 신이 났다. 밝아진 나의 표정의 이유를 들으신 원장님이 새소리를 써보라고 하셨다. ‘새소리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망설이는 나에게 느낀 그대로 적어보라고 하셨다. 그날 내가 쓴 새소리는 글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한글로 쓴 그림이었다. 

나는 새소리를 그린다. 친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던 나에게 어느 날 문득, 갑작스레 찾아든 친구, 깊은 숲 너머 들려오는 보이지 않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나의 교실에서 떠드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였다. 그 형태는 없지만 나에게 분명히 친구였던, 나의 친구, 나의 세상, 나의 우주. 나의 고통과 웃음을 함께해주는 새소리를 나는 추상적으로 표현하여 그려낸다. 

그리고 제주에서 나고 자라며 늘 보아았던 돌담, 식물 등을 단순한 형태와 색상으로 재구성한다. 화면은 돌, 식물, 색감으로 구성되고, 때로는 작품으로 대변하는 사건, 작업을 할 때의 감정에 따라 한가지 요소가 튀어나와 부각되기도 한다. 

여기저기 많은 돌은 ‘사람’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사건과 관계로 엉켜져 한 사회를 구성해내듯, 돌들은 때로는 큰 바위가 되어 화면의 균형을 이룬다. 

들풀, 나뭇가지, 줄거리 잎사귀 등 다양한 식물들은 ‘주변 환경’을 나타낸다. 돌담 주변 식물들은 서로 얽혀 있어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고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외관상 보여지기도 하지만, 가냘픈 자신들이 제주의 거친 바람에 버텨낼 수 있게 서로의 힘이 되어주고, 돌담을 더욱 단단하게 붙들어 태풍에도 견디어 낸다. 

나의 작품에서 새소리는 형태는 없지만, 우리에게 분명히 있는 소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돌과 들풀처럼 그 형태가 있는 것마저도, 그 형태를 나타내려 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에게 주는 영향을 그려내고자 한다. 그 상황과 그 느낌과 그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다. 



작가노트


작가노트 From Emotion: mama

2005년 10월 3일이라 했다. 부모님과 함께 무작정 거제도 깊은 산골로 들어간 날. 내 인생의 가장 강렬한 기억들이 시작된 날.
7살에 시작한 병과의 싸움이 11살 되던 해,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지경이 되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대체의학 공동체로 찾아갔다.

원장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이라 초등학생인 나를 늘 자상하게 챙겨주었다. 나에게는 선생님이었고 할아버지였고 의사 선생님이었다.

원장 할아버지가 구입한 산골 폐교를 고쳐서 사는 공동체에서의 생활은 자급자족이 기본이며, 전자제품 사용 금지, 전기는 최소한 사용으로 인터넷도 핸드폰도 안 되었다. 어머니와 나를 두고 직장 때문에 제주로 돌아간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하지만 우리는 매번 전화 안 터진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번 약속한 시간에 전파가 가장 잘 터지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아빠와 통화를 한다. 그렇게 나는 시대를 거슬러 자연 속에서 살았다.

환자인 나에게 주어진 일과는 아침 6시에 운동장을 2바퀴 돌고 뒷동산을 올라갔다 온 후에 아침 밥을 먹는 것이었다.
뒷동산, 아침밥을 먹기 위해 반드시 올라가야 하는 곳. 폐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박물관이란 팻말이 붙여진 낡은 교실 앞을 지나면 대나무 숲이 나오고, 누구도 캐 먹을 수 없는 오래된 도라지밭을 지나면 뒷동산 입구다. 어제 들고 다녔던 막대기를 찾아 들고서 덤불을 쳐내고 괜스레 솔방울을 발로 차며 올라간다.

뒷동산에 오르는 이는 원장 할아버지와 엄마, 나뿐이다. 부산 할아버지네와 서울 아줌마네는 건강이 안 좋아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그저 뒷동산 어귀까지 올라와 햇볕을 쪼일 뿐이었다. 
그 어느 날도 동네에 다른 이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루는 원장 할아버지가 길을 잃어 헤매다 내려오니 10시가 넘어 아침을 먹었다.

11월이 되자 뒷동산에 누르스름하니 단풍이 들었다. 원장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훈아! 오늘은 뒷동산에서 새소리를 적어 와라." 원장 할머니가 주신 볼펜과 작은 공책을 들고 뒷동산을 향했다. 뒷동산 첫 능선을 지나 중턱에 오르자 새소리가 맑게 들렸다. 뭐라 우는지 다 적을 수 없는 새소리들. 그날 나는 그곳에 새가 있음을 처음 알았다. 이름 모르는 새소리들…. 휘비비 삐비비…. 벌써 5개월째 친구 없이 또래의 아이도 없이, 두서너 명의 어른들과 어울려 살고 있는 나에게 새들은 반가운 친구였다. 고개를 쳐들어 새들을 찾아보고, 게으름이 치솟아 걷기 싫은 날은 새들을 핑계로 벌러덩 누워 새를 찾으며 놀았다. 도무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나의 친구…. 하지만 나는 새소리를 들으며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새들과 친구가 되어 갔다.

그날은 같이 오르던 어머니가 물통을 가지러 잠시 내려갔고, 저 멀리 앞장서 걸으시는 할아버지를 쫓아 혼자 걷고 있었다. 빨리 안 오는 어머니에게 심통이 나서 툭툭 치던 막대기에 뱀이 걸렸다. 놀라 막대기를 휘두르자, 막대기에서 떨어진 뱀이 내게로 기어 온다. 막대기로 뱀이 머리를 꽉 눌렀다. "할아버지 뱀이에요" "죽여라." 더 세게 눌렀다. 뱀이 죽었음을 느껴질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더 세게 눌렀다. 그리고 뱀의 꿈틀거림이 멈추자, 막대기를 들어 마구마구 내려쳤다. 그리고 물통을 들고 올라오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엄마 가. 그냥 날 버리지 왜 올라오는데, 엄마 가. 나 혼자 산 올라갈 거야 가“

12월이 되자 해는 더 짧아지고 밤은 더욱 길어졌다. 깊은 산의 새벽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새벽예배를 위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어머니가 손전등을 들고 앞장선다. 운동장을 건너오는 손전등 불빛은 부산 할아버지네다. 그리고 작은 예배당 건너편에 주무시는 서울 아줌마네 손전등 불빛이 반짝거리면 모두가 모인 것이다. 우리 방은 예배당 뒤로 돌아 뒷동산 가는 길목에 있어 더욱 어둡고 무서웠다.

전기를 아끼라는 원장 할아버지의 잔소리에 우리는 8시가 되면 소등해야 했다. 5시에 저녁을 먹고 7시에 모여 예배드렸다. 예배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불빛은 작은 손전등뿐이었다. 나의 손전등은 심심하여 온 동네를 휘감아 비추고 엄마의 손전등은 내 발밑만 비춘다. 운동장 건너 소박하게 비치는 불빛은 부산 할아버지가 오늘은 평안하다는 뜻이고 원장 할머니 방 불빛은 성경 필사하는 불빛이었다. 그리고 깜깜한 방에서 슬쩍슬쩍 새어 나오는 원장 할아버지 방 불빛은 나한테 보지 말라고 호통치시던 이곳에 한대 밖에 없는 TV를 몰래 보는 게 분명하다.

2005년 11살의 가을에 찾아간 거제도의 산골 공동체에서 겨울을 보내고 건강을 회복해 나왔다. 그전 병원에서의 혹독한 외로움과 고통을 겪은 후 만난 나의 유년기. 자연 속에서 나는 외로웠고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궤에서 비를 피하는 노루처럼 평안하고 포근하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운동장을 돌지 않아도 되고, 뒷동산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예배당에서 하루 종일 논다. 엄마는 성경을 읽고 나는 만화책을 읽으며. 어머니와 단둘이 있던 그날의 빗소리는 포근하였다. 




작가노트


작가노트 궤_괴 

궤에는 괴가 있었을까? 제주에서는 반닫이장을 궤라 한다. 할머니의 궤에는 고운 한복이 있었고, 어머니가 사드린 맛난 과자와 사탕이 있었다. 궤에는 귀한 것, 그리고 소중한 것들이 들어간다. 우연히 청산별곡의 ‘괴’를 만났다.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디에다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우노라. 청산별곡 속 ‘괴’는 사랑이었다. 

어린 시절 지병으로 인해 혼자 지내왔던 시간, 나는 궤 속에 있는 아이였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모든 이들이 꺼져가는 불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아이. 그런 나의 궤속에는 늘 사랑이 괴어 있었다. 그리고 돌들이 서로 괴어 돌담이 되고 태풍을 이겨내듯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까지 나에게는 돌담마냥 괴일 수 있는 관계었다.

나의 어린 시절 도심을 떠난 외진 숲속, 궤와 같은 환경속에서 자랐다. 그로인해 자연과 어울려 지냈던 수많은 순간들을 기억한다. 나의 기억을 바탕으로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서로에게 괴여(기대어) 서로에게 괴(사랑)가 되는 사람들 간의 관계 그리고 소통에 주목해 본다. 그 속에서 삶의 의미, 사회 속 나의 가치를 찾는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늘 보고 자랐던 돌담, 식물 등을 단순한 형태와 색상으로 재구성한다. 화면은 크게 돌, 식물, 색감으로 구성되어지고, 때로는 작품으로 대변하는 사건, 작업을 할 때의 감정에 따라 한가지 요소가 튀어나와 부각되기도 한다. 

돌들은 ‘사람’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엉켜있거나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한 사회를 구성해내 듯 화면의 균형을 유지한다. 

나뭇가지, 잡초 같은 식물들은 ‘주변 환경’을 나타낸다. 돌담 주변 식물들은 얽히고설켜 외관상 방해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돌담이 태풍에 넘어지지 않게 버티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화면 전체를 아우르는 색감은 ‘상황’과 ‘분위기’를 의미한다. 스케치할 때 특정 사건을 떠올리고, 그 사건 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색감으로 전달하려 한다. 

나를 찾기 위하여 자연을 다시 상상하며, 본질을 향해 변형해 나가는 자연을 관찰한다. 사람은 ‘궤’를 추구하고 ‘괴’를 찾는다. 보장된 안전한 미래를 위해 개인의 이익에 집착한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말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해답처럼 우리의 진정한 궤는 ‘괴’ 사랑일 것이다. 개인의 만족이 아니라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통로는 아닐까.




평론

그림의 느낌이 그림의 뜻이다
-김지훈 개인전 추상을 찾아서 겨울에서 봄까지 ‘색채의 온도’에 부쳐


미술평론가 김유정(한국미술평론가협회)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이 “마음으로 그려라”라는 말에는 다분히 추상미술에 대한 단초가 있다. 서양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서양미술의 전통은 “다시 나타내다”라는 의미에서 ‘재현(再現(reproduction)’ 미술의 오랜 역사가 있다. 물론 추상미술이 모더니즘 시대의 산물만은 아니다. 이미 추상적 형상은 자연을 해석하거나 마음의 작용의 결과물인 작품에 내재되 있는 속성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소위 회화에서 구상미술의 등장은 3만 년 전 구석기시대 산물인 쇼베 동굴벽화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고 있고, 이어 신석기시대에는 문자 기호의 상징들이 등장하면서 추상미술의 연원을 더듬을 수가 있다. 사실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은 조형예술에 통합된 하나의 밀착된 속성인 것이다. 허버트 리드의 말대로 “본래 모든 예술은 추상적이며…삶의 리듬을 찾는 불확정의 물질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조형미술에는 동시에 구상적 표현과 추상적 표현의 형상들이 섞여있다. 이는 미술이 근원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그 두 가지 형상을 따로 분리해서 볼 수도 있거나 함께 섞여서 존재한다. 즉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은 추상적인 구조들로 이루어지고, 또 반대로 추상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짜인 사실적인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의 예술의 의미를 봐도 사실(寫實)과 사의(寫意)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사실은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말하고, 그리고 사의는 화가의 심리상태에 따른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사실(寫實)과 사의(寫意)라는 두 가지의 개념도 예술은 마음의 작용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추상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특히 서양에서의 추상미술은 사진의 발명과도 연관이 있다. 르네상스 이후 초상화와 풍경화의 발전과 함께 그것을 복제할 수 있는 사진술의 발명에 따라 사실주의 회화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형적 표현인 표현주의 미술이나 추상미술로 나아가는 계기가 했다. 사실상 사진술에 의한 복제의 증가는 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풍경의 재현적인 묘사로부터 마음의 자유로운 표출로 미술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간 계기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의 역사에서 세잔의 등장은 모더니즘 회화 형식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고했다. 물론 미술에서의 형식의 해체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에서부터 나타나지만, 시대의 변화는 곧 새로운 조형의지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 세잔의 획기적인 윤곽선의 해체와 분해되는 형태의 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했다. 현대미술의 확장을 가져다줌으로써 미술의 경계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청년작가 김지훈의 첫 개인전은 추상미술로 시작된다. 그가 세상을 그는 방식은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추상으로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당장에 소통의 문제가 따르기도 하는 일이다. 사실상 주변에서는 풍경의 아름다움, 인물, 무엇인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물의 배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추상으로 그린다는 것은 대상이 무엇이든 말 그대로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의 말대로 “오직 대상들이 존재할 때만 세계의 확고한 형식이 존재할 수 있다” 

세계는 대상들로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예술가의 형식이 탄생한다. 형식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김지훈은 자연의 수많은 대상들을 추상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데 식물, 꽃, 바람, 돌담 등 마음이 따르는 데로 표현하고 있다. 그 대상들을 묘사하기보다는 즉흥적인 면과 형태들로 이루어져 하나의 생각들이 빚어내는 것이다. 추상적인 표현들은 어떤 형태와 색채로 이루어진 율동이다. 돌담이 넓은 잎사귀처럼 보이기도 하고 꽃이 장식 무늬처럼 보이는가 하면 공간을 갖는 선들은 어떤 식물인지 알 수가 없다. 추상미술이 주는 맛은 관람자가 누리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사실상 추상미술에서는 무엇을 닮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람자 각자가 무엇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의 충실한 의미를 알기 보다는 감각적 느낌을 어떤 식으로 받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구상미술에서는 ‘그림은 하나의 사실’이 되지만 추상미술에서는 ‘그림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가’가 된다. 

김지훈은 공간의 작은 분할을 표현하는 색면추상적인 성격의 작업을 주도했다. 청년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가능성을 선뜻 예견할 수 없지만 대체로 세상이 구상미술이 대세인 상황에서 추상미술로써 “세계를 보는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젊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추상미술은 난해하게 여기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을 딱히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추상미술의 감상적인 본질인 “당신의 느낌대로 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렵다는 표현보다는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 즐거운 것이 된다. 

예술은 하나의 큰 즐거움에 틀림이 없다. 보는 사람들이 자기 선호의 색과 발랄한 형태들, 무작위로 전개되는 화면의 배치에서 남모르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추상미술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ego)는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며, 감정 또한 환경의 무게에 따르는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감정은 무의식의 심연을 따라 흐르다가 솟구치기가 일쑤이다. 감정의 기폭(起爆)은 예측불가능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김지훈의 추상미술을 찾는 ‘색채의 온도’ 전은 시간적으로 겨울에서 봄까지의 온도차를 느끼게 한다. 색채의 온도란 형태를 찾아가는 여행에서 느끼는 작가의 감정적인 차이를 말한다. 온도가 주는 물리적인 의미로 보면, 외부적인 계절에서 달라지는 색상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의 변화가 충동적인 열에너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열에너지는 감정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제주의 추상미술의 전통은 매우 짧다. 한국전쟁 이후 추상미술의 시초는 기록상 김택화(1962년), 강태석(1965)이다. 이 두 사람은 한국전쟁 기에 미술 수학을 하고 육지로 가 추상을 공부하여 제주로 귀향했다. 그 후 관점 동인들(1977), 한명섭, 백광익, 고민철 등이 추상화가들이다. 김지훈 또한 이제 새롭게 제주 추상미술의 길 위에 섰다. 

이번 김지훈의 첫 번째 개인전은 화가로서의 갈림길에서 추상미술을 선택한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 그가 제주미술의 새로운 공감의 길을 열어가는 시각에서 보면,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느끼는 감정으로 “설렘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암울함에 붙잡힌 불안감, 복잡하고 다양한 일상”들을 (제주)자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도 예술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살 수 있고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림의 느낌이 그림의 뜻이다.”